아버님은 열심히 기타를 뜯으시면서 남인수의 "애수의 소야곡"을 그렇게도 구슬프게
부르셨다. 아니 장가가신 분이 그런 노래를 그렇게 구성지게 불러도 어머니한테
야단 안맞고 사셨다는 것이 다행스러운 그 시대였나 보다.
게다가 틈이 나면 아버님은 Mario Lanza의 판을 걸으셨다.
아리 베 데치 로마~~ 후렴에 나오는 귀여운 꼬마의 목소리가 낭낭하게 기억난다.
정동의 한복판이었던 우리집엔 자그만 연못도 있었고, 바로 붙은 담 너머는 미 대사관
파티장이었다. 요즘말로 그랜드 볼룸정도랄까?
왠 한국여자들이 그렇게 파티장에 많아야 했는지는 십년이 더 지나서야 이해가 되었다.
그 담밑으로 그 옛날 대부분의 집들이 그렇듯이 야외 분리형 Toilet가 있었다.
물론 나무로 덧대만든 엉성한 그런 것이었다. 아침이면 나래비줄을 서야 했음은 물론이다.
3남3녀의 우리집안에서 나는 위로 누이를 두명 두었었다.
큰 누이는 원래 그림을 잘 그려서 미대를 가려고 했다가 고등학교때부터 성악으로
전공을 바꾸었다. 말괄량이 성질에 고약한 미술선생하고 한판 크게 벌렸음은 물론이다.
성악으로 전공을 바꾼 것은 좋았는데.....
연습실이 따로 있을 수 없는 집안형편상, 가장 좋은 연습실은 물론 화장실이었다.
아니 그보다는 용적상 자신의 소리가 가장 잘 들리는 가옥구조를 지닌 방이 그방이었는
지도 모른다. 좌우간 화장실에선 내 노래가 잘 울린다.
처음에는 목을 따는 소리였다가 언제부터인가 부터는 점점 제대로 된 소리가 되고 나중엔
아! 잘 부른다는 생각이 들때가 많았다.
그리하여 나는 원치 않았건 원했건, 수 많은 가곡을 공짜로 들었다.
저 바람 흘러가는 곳....동심초, ...그리고 지금 이 아침에 듣는 비욜링의 Adelaide도
많이 들었다.
그만큼 누이는 열심히도 노래를 했던 것 같다.
후일 유학의 꿈도 접고 학교선생님으로 묵묵히 살아오셨던 큰 누이.
그리고, 혈혈단신 38선을 넘어 홀로 내려오신 아버님.
한분은 외로움을 달래려고 늘 기타를 뜯으셨을 것이고, 또 한 사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
젊음과 음악에의 열정을 토해보려고 진정 토를 할때까지 그 골방에서 발성연습을 했나보다.
나도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그 나홀로 노래방을 애용하기 시작하였다.
물론 그 후에 새집으로 이사를 갔지만, 그래도 제발 좀 문 꼭 닫고 목따는 소리내라는 여동생의 간청을 늘 들으며
학창시절을 보냈다.
이제 내 나이도 오십을 넘겼다.
그런데도 아직 내 귀엔 두 사람의 기타와 목소리가 쟁쟁하다.
아버님의 기타선율이 그대로 기억된다.
누이의 목청의 끝떨림까지 그대로 남아있는 듯 하다.
음악은 정말 좋은 것이다.
난 아직도 화장실에서 노래한다. 물론 젊었을때 처럼의 자신감은 없다.
그래도 목욕탕효과는 조금 나기에 왠만한 노래방보다는 나을게다.
그리고 노래함에 부끄러움이 없다.
어려서 부터 그렇게 자라나와서 그런 모양이다.
아! 그 마당이 그립다. 내 여동생을 세발자전거에 태우고 뱅뱅돌던 그 자그마한 마당이
있는 그 집.
정동 1번지 11호.
어제는 큰 누이의 1주기 추도회가 있는 날이었다.
모두가 즐거웠다. 그녀가 남긴 음악에의 여운이 있었기에......
누이는 우리를 매년 이렇게 즐겁게 만나게 해 줄 것이다.